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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르후 전투때 강홍립의 처지

사르후전투는 명나라군이 2배 이상의 수적우위를 말아먹고 대패한 전투

도원수 강홍립이 치계하기를,

"대설 중에 행군하느라 각영 병사들이 가진 군장과 의복이 모두 젖은데다가 도독의 전진하라는 명령도 없었으므로 신들은 주둔하여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조금 뒤에 도독이 강안찰과 함께 양마전으로 와서는 사람을 보내어 신들을 전진하도록 재촉했으므로 신들은 즉시 삼영의 병마(兵馬)에게 명하여 먼저 출발하였습니다. 양마전에서 15리 되는 전두산(轉頭山)에 닿았을 때에는 날이 이미 저문 뒤였으므로 여섯 장수와 함께 모두 진을 치고 밤을 지냈으며, 부원수는 유삼(劉三), 교 유격과 함께 전두산에서 십여 리쯤 지나서 떨어진 곳에 주둔하였습니다. 신 홍립이 가서 도독을 만나보고 각 방면 군사의 수를 물었더니, ‘서남 방면에 대병(大兵)이 일제히 전진하고 있고, 동쪽 방면의 군사는 내가 친히 거느린 장정 수천 명과 각 장수가 거느린 병사가 있을 뿐이니, 통틀어 1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동쪽 방면의 군대가 매우 고립될 텐데 대인(大人)은 왜 군대를 요청하지 않습니까?’ 하고 신이 물었더니, 말하기를 ‘양 대인(大人)과 나는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고, 나도 나라의 큰 은혜를 입었으므로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직 벼슬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관전(寬田)에 남겨두고 온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왜 이렇게 빨리 전진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병가(兵家)의 승산은 오직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얻고 인심을 따르는 데에 있을 뿐이다. 날씨가 아직 추우니 천시를 얻었다고 할 수 없고, 도로가 질척거리니 지리를 얻었다고 할 수 없지만, 내가 병권을 잡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답하였는데, 무척 기분이 나쁜 기색이었습니다. 신들이 그 진영에 나가 보니 기계가 허술하고 대포와 대기(大器)도 없었으며, 오직 우리 군사들을 믿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였다. 【유정(劉綎)이 일찍이 사천(四川)에서 진무하던 때에는 수하에 매우 날래고 용맹한 묘병(苗兵)이 있어서 일찍이 서강(西羗)을 방어할 때에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유정이 그들은 조금 필요로 하였으나 양호가 전진하도록 재촉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

 

요약: 당시 명나라군은 그냥 개판이여서 막 임진왜란 끝난 조선에서 온 지원군이 주 병력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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